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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야 겐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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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미야 겐지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이바라키현 출신으로, 니혼 대학을 거쳐 1949년 오사카 타이거스(현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투수와 야수로 활약했다. 1958년 타율 0.320으로 수위 타자를 차지했으며, 1956년부터 1958년까지 3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59년 다이마이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적하여 1960년과 1961년에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1960년 일본 시리즈 감투상, 1961년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다. 1963년 은퇴 후 주니치 드래건스 타격 코치, 도에이 플라이어스/닛타쿠홈 플라이어스 감독, 웨이취안 드래건스 감독 등을 역임했다. 2002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10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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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야 겐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9년 다미야 겐지로
1959년
출생일1928년 2월 11일
사망일2010년 5월 5일
출생지이바라키현 시모다테시
사망지이바라키현
신장175
체중81
타석
투구
선수 경력
포지션외야수, 투수, 1루수
프로 입단 연도1949년
첫 출장1949년
최종 출장1963년 10월 13일
선수오사카 타이거스 (1949 - 1958)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 (1959 - 1963)
감독 및 코치 경력
감독도에이 플라이어스 (1970–1973)
닛타쿠홈 플라이어스 (1974)
웨이취안 드래건스 (1994–1995)
코치주니치 드래건스 (1968 - 1969)
한신 타이거스 (1988)
수상
베스트 나인 수상5회 (1956–1958, 1960–1961)
파이팅 스피릿 상1960년
통계 (NPB)
타율.298
홈런105
안타1,415
타점591
도루190
승패 기록1–5
평균 자책점5.83
기타
야구 명예의 전당일본 (2002년)

2. 선수 경력

1949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투수로 입단하여 11승을 거두었다. 1950년 3월 16일 국철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9회 2아웃까지 퍼펙트 게임을 이어갔으나, 마지막 타자에게 안타를 맞아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 달성에 실패했다. 이 경기가 투수로서의 마지막 승리였다.[5]

같은 해 어깨 부상으로 야수로 전향, 단식 다이어트로 체중 감량 후 1루수를 거쳐 외야수로 정착했다.[6]

1952년 우익수로 56경기에 선발 출장, 5월 말에는 투수로 2경기 선발 등판했으나 2연패했다. 1954년 중견수로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300 (리그 8위)를 기록했다. 1955년 타율 .288 (5위)로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했다. 1956년 타율 .300 (3위), 1957년 타율 .308 (2위)와 37도루를 기록했다. 1958년 타율 .320으로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1958년 오프 시즌, A급 10년 선수 제도의 보너스 수급 권리를 행사하려 했으나, 구단과의 협상 결렬로 다이마이 오리온스로 이적했다.

1959년 다이마이와 계약, 1960년1961년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1960년 "미사일 타선"의 일원으로 리그 우승에 공헌, 일본 시리즈 감투 선수상을 받았다.[2] 1961년 자기 최고 타율 .328(리그 3위)을 기록했다. 1963년 혼도 야스지 감독과의 불화로 선발 출장이 감소하며 은퇴했다.

2. 1. 프로 입단 전

다미야는 이바라키현 시모다테시에서 태어나 시모다테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니혼 대학에 진학하여 1947년 도쿄 육대학 야구 연맹에서 타격왕을 차지했으나 중퇴했다.[6]

도토 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투타 겸업으로 활약했다. 우승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1947년 가을 리그에서는 타율 0.427로 수위 타자를 차지했다. 같은 시즌 주오대와의 1차전에서는 고다마 미쓰히코와의 계투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네모토 리쿠오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유도에도 정진하여 2단의 실력이었다.

1948년 시즌 종료 후 오사카 타이거스가 대학 중퇴 및 프로 입단을 권유하며 교섭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3년 계약을 맺었다. 오사카 구단 대표 토가시 코이치는 "투수로 입단해도 타자로 전향하여 성공한 사람은 많다. 당신도 투수로 입단하시오. 그리고 타자로 전향해도 전혀 늦지 않다"라며 가와카미 테츠하루, 미즈하라 시게루, 후지무라 후미오, 벳토 훈 등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득했다고 한다.[4]

다미야는 오사카와의 교섭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다음 날 요미우리 자이언츠 관계자가 입단 교섭을 오겠다는 전보가 도착했다. 다미야는 이바라키 출신이라는 점도 있어서 원래 거인 팬이었고, 감독 미하라 오사무가 직접 교섭에 방문한 거인 측도 "아직 가계약 단계. 철회할 수 있다"라며 열성적으로 유혹했지만, 다미야는 "처음으로 말을 걸어주었기 때문에"라며 오사카에 입단했다. 일설에 따르면, 미하라의 권유로 다미야는 오사카와의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계약금인 50만수표를 가지고 혼고의 시미즈 여관에 숙박하고 있는 토가시를 방문했지만, 한 발 앞서 귀향하여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4]

2. 2.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49-1958)

1949년부터 투수로 활약하며 11승을 거두어 미래의 에이스로 기대를 받았다. 1950년 3월 16일 국철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9회 2아웃까지 퍼펙트 게임을 이어갔으나, 27번째 타자 나카무라 사카에의 타구가 후지무라 토미오의 판단 실수로 내야 안타가 되면서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노히트 노런 달성에 실패했다. 투수로서는 이 경기가 마지막 승리였다.[5]

같은 해부터 어깨 부상으로 야수로 전향을 시도했다. 감독 마츠키 겐지로는 다미야가 체중 과다로 전향이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본인의 열의로 체중 감량을 지시받고 실가로 돌아갔다. 다미야는 단식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 20일간의 단식 다이어트를 통해 감량에 성공, 마츠키의 지도 아래 타자로 성장했다. 수비에서는 1루수를 맡았으나 서투른 모습을 보였고, 이후 외야수로 전환하여 정식 외야수로 자리 잡았다.[6]

1952년 개막부터 우익수로 기용되어 56경기에 선발 출장했고, 같은 해 5월 말에는 투수로 2경기에 선발 등판했으나 2연패를 기록했다. 1954년에는 중견수로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300 (리그 8위), 30도루 (2도루 실패)를 기록했다. 1955년에는 타율 .288 (5위)를 기록하고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했으며, 주로 5번 타자로 기용되었으나 후지무라 토미오의 부진으로 4번 타자를 맡기도 했다. 1956년에는 타율 .300 (3위), 1957년에는 타율 .308 (2위)와 37도루를 기록했다. 1958년에는 타율 .320으로 수위 타자를 획득, 나가시마 시게오의 3관왕을 저지하고 개인 최고 기록인 62타점 (4위)을 기록했다.

1958년 오프 시즌, 다미야는 A급 10년 선수 제도 권리 중 보너스 수급 권리를 행사하려 했다. 당시 규정 미비로 인해 커미셔너 기관은 "A급 권리로 보너스를 받고 잔류하면 A급으로 남고, 이적 자유 권리는 남는다"라는 견해를 제시했다.[7] 한신 구단은 이적 가능성이 있는 선수에게 보너스 지급을 꺼려 소극적인 협상을 진행했다.

다미야는 보너스를 요구하며 잔류 의사를 밝혔으나, 한신은 시즌 2승 후 타 구단으로 방출된 오사키 미츠오와 비슷한 약 800만을 제시했다. 다이마이 오리온스, 히로시마 카프, 한큐 브레이브스, 긴테쓰 버팔로가 영입에 나섰고, 다이마이는 한신의 두 배에 달하는 보너스를 제시했다. 한신은 증액을 제시했지만, "쩨쩨한" 방식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한신은 다미야에게 계약 의사가 없음을 통보했고, 다미야는 이적 자유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다미야는 지바 시게루가 있는 긴테쓰로 이적하려 했으나, 한신에서 다이마이로 이적한 스카우트 아오키 이치조의 강력한 권유와 도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다이마이로 이적했다. 한신한큐의 모기업 라이벌 관계로 인해 마쓰키 감독은 다미야에게 도쿄행을 권유했다. 히로시마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6]

2. 3. 다이마이 오리온스 시절 (1959-1963)

1959년 다이마이 오리온스와 계약했고, 야마우치 카즈히로와 함께 리그 1위의 2루타를 기록했다. 1960년1961년에 두 번 더 베스트 나인 상을 수상했다. 1963년에 은퇴했다. 다미야는 100홈런을 기록하고 투수 승리를 거둔 6명의 NPB 선수 중 한 명이다.[2]

한신 시절에 이어 주로 3번, 5번 타자를 맡았다. 1960년에는 전반기에는 2번 타자, 후반기에는 1번 타자를 맡아 타율 .317(2위)의 성적을 남겼다. 수위 타자를 획득한 에노모토 키하치, 홈런·타점 2관왕을 차지한 야마우치 카즈히로(타율은 3위)와 함께 리그 타율 상위 3위를 독점하여 "미사일 타선"의 한 축을 담당하며, 그 해의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다이요 웨일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경기 모두 중견수로 출장했다. 팀의 일본 제일은 이루지 못했지만, 3차전부터는 4번 타자로 기용되어 14타수 5안타 1타점을 기록하여 해당 시리즈의 감투 선수상을 획득했다.[2] 1961년에는 자기 최고 타율인 .328(리그 3위)을 기록했다. 1962년에도 타율 .308에 도달했지만, 1963년에는 혼도 야스지 감독으로부터 냉대를 받아 선발 출장이 감소했다.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통산 타율 3할에 아쉽게도 3리가 모자랐다.[2]

3. 지도자 경력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 타격 코치를,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도에이 플라이어스·닛타쿠홈 플라이어스 감독을 역임했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는 중화 직업봉구 대련맹의 웨이취안 드래건스 감독을 맡았다. 닛타쿠 퇴단 후에는 TBS·ABC 해설자(1974년 - 1987년)로 활동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명확한 해설[13]을 했고, 사비로 미국에 코치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1978년 오프에는 한신이 고토 쓰기오의 후임 감독 후보로 다미야를 지목하고 취임 요청을 수락했지만, 고즈 마사지로의 의향에 따라 백지화되었다.[14]

1983년에는 모교인 니혼대학 특별 코치를 맡아 오전 9시 30분부터 저녁까지 특타를 지도하는 등 후배들을 단련시켰다.[15]

1984년부터 18년간 한신의 OB회 회장을 맡았으며, 거침없는 발언으로 명물 회장으로 불렸다. 한편 1999년 감독으로 취임한 노무라 가쓰야와 격렬하게 대립하여, 노무라가 OB회 총회를 결석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988년에는 친정팀 한신의 헤드코치로 취임했지만, 5월 6일 왼쪽 다리 허벅지근육 파열로 벤치를 떠나 치료에 전념했다.[16] 6월 15일에는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과의 관계 악화[16]로 사임하고 프런트에 합류했다.[17] 헤드코치 취임은 오카자키 요시토 구단 사장이 무라야마에게 감독 취임을 요청한 날과 같은 날, 도쿄·세타가야에 있는 다미야에게 전화하여 요청한 것으로,[16] 무라야마의 의향보다 먼저 다미야 취임이 내정되었다.[16]

감독으로서 통산 성적은 155승 209패 21무(승률 .426)이다.

3. 1. 주니치 드래건스 타격 코치 (1968-1969)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8]

3. 2. 도에이 플라이어스 / 닛타쿠홈 플라이어스 감독 (1970-1973)

1970년 도에이 플라이어스 헤드코치로 취임했다. 같은 해 마쓰키 겐지로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모두 B클래스에 그쳤다. 1973년 닛타쿠 홈으로 바뀐 뒤 전기 시즌 말에 해임되었고[8], 후기 시즌부터는 구단 기술 고문이 되었다[9]

장본훈은 자신의 저서에서 "T 감독은 냉정함을 잃고 4회에 기용한 대타를 8회에 다시 기용하려고 했다"고 평했다. 주력 선수였던 백인천과는 견원지간이었다[8]。 구단주인 니시무라 아키타카는 "다미야 감독은 선수 관리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야구계는 야구 경험자라는 것만으로 관리 공부는 하지 않았다. 이래서는 선수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8]。 또한 장본훈은 "선수들의 기량은 고루 갖춰져 있었다. 특히 오하시는 발도 빠르고 어깨도 좋고 장타력도 있었다. 그것을 다미야 겐지로 감독은 방망이를 짧게 잡고 치게 했다. 길게 잡고 치게 했다면 홈런왕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굉장한 소질이 있었는데 한큐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오하시의 가세로 한큐는 더욱 강해졌다."라고 말했다[10]

1971년 프런트에 외국인 선수 보강을 제안했지만, 오래전부터 척 태너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칼턴 한다 코치에게 오픈전 지휘를 맡기고 미국으로 건너갔다[11]

1973년 반다가 미국으로 가게 되었지만, 급히 반다에게 오픈전 초반 지휘를 맡기고 다미야 자신이 미국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다[12]。 도미 전 회의에서 "우익수"를 타겟으로 몇 명의 후보자를 결정하고 있었으며, 도착 후에는 플로리다주사라소타의 시카고 화이트삭스 캠프에 합류하여 태너의 안내 하에 후보가 된 선수들을 직접 확인했다[12]

감독 생활 외에 자동차 수리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고, 오토 레이스 승부 조작 혐의(검은 안개 사건)로 야구계를 떠났던 가쓰라기 다카오가 근무하고 있었다.

다미야는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스 감독으로 3년 동안 팀을 이끌며 155승 209패 21무를 기록했다.

3. 3. 웨이취안 드래건스 감독 (1994-1995)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중화 직업봉구 대련맹(CPBL)의 웨이취안 드래곤스 감독을 맡아[18] 83승 104패 3무의 성적을 기록했다.

4. 은퇴 이후

다미야는 고향인 시모다테의 시의원을 지냈다. 그는 2010년 5월 5일, 82세의 나이로 뇌출혈로 사망했다.[4]

5. 이력

다미야 겐지로는 일본 야구 연맹의 오사카 타이거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투수와 1루수를 맡았다. 1950년 3월 16일,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사카에 나카무라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아쉽게 무산되었다. 1952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인해 외야수로 전향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다미야는 오사카 타이거스 소속으로 1956년, 1957년, 1958년에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57년에는 장타율3루타 부문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고, 1958년에는 타율과 3루타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1959년, 다이마이 오리온스로 이적한 후 야마우치 카즈히로와 함께 2루타 부문 리그 1위를 기록했다. 1960년과 1961년에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63년에 은퇴한 다미야는 NPB 역사상 100홈런과 투수 승리를 모두 기록한 6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6. 수상 및 타이틀 경력

다미야 겐지로는 통산 15시즌 동안 1488경기에 출장하여 5372타수 4807타석, 642득점, 1427안타, 284개의 2루타, 55개의 3루타, 106개의 홈런, 2139루타, 597타점, 190도루, 61희생 번트, 18희생 플라이, 416볼넷, 53사구, 467삼진, 95병살, 타율 0.297, 출루율 0.365, 장타율 0.445, OPS 0.810을 기록했다.[4] 1960년 5월 29일에는 역대 53번째로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기록내용
1000경기 출장1960년 5월 29일



또한, 올스타전에 7회(1955년 - 1958년, 1960년 - 1962년) 출장했다.

6. 1. 타이틀

다미야 겐지로일본어일본 프로 야구에서 수위 타자 1회(1958년), 최다 출루수 1회(1958년)를 기록했다.[4] 베스트 나인에 5회(외야수 부문: 1956년 - 1958년, 1960년, 1961년) 선정되었다.[4] 1960년 일본 시리즈 감투상,[4] 1961년 올스타전 MVP를 1회 수상했다.[4] 2002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4] 같은 해 지쿠세이시 시민 영예상을 수상했다.[4]

1958년에는 타율 0.320으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수위 타자가 되었다.[4]

연도소속팀타율비고
1958년오사카.320수위 타자


6. 2. 수상

수상 경력


7. 개인 기록

田宮 謙次郎|다미야 겐지로일본어는 일본 프로 야구 오사카 타이거스에서 투수와 1루수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 1950년 3월 16일, 사카에 나카무라에게 안타를 맞기 전까지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단 한 아웃만 남겨두고 달성할 뻔했다.[1] 1952년 어깨 부상으로 외야수로 전향하여 선수 경력의 나머지 기간을 보냈다.[1] 타이거스에서 1956년, 1957년, 1958년에 세 번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1] 1957년 장타율3루타 부문, 1958년 타율과 3루타 부문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다.[1] 1959년 다이마이 오리온스와 계약했고, 야마우치 카즈히로와 함께 리그 1위 2루타를 기록했다.[1] 1960년과 1961년에 두 번 더 베스트 나인 상을 수상했다.[1] 1963년에 은퇴했으며, 100홈런을 기록하고 투수 승리를 거둔 6명의 NPB 선수 중 한 명이다.[1]


  • 올스타전 출장 : 7회(1955년 ~ 1958년, 1960년 ~ 1962년)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60년 5월 29일(53번째)

8. 등번호

연도등번호
1949년28
1950년 ~ 1951년6
1952년 ~ 1958년, 1960년 시즌 도중 ~ 1963년22
1959년 ~ 1960년 시즌 도중9
1968년 ~ 1969년67
1970년40
1971년41
1972년 ~ 1973년50
1988년70


9.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소속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번트희생플라이볼넷고의4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49년오사카407166712201176000
3
221
.182.239.258.497
1950년1921201410052000
1
021.200.238.250.488
1951년6220000000000
0
010.000.000.000.000
1952년9421319020478278034604
14
5170.247.316.421.737
1953년80217189244460359171432
17
9241.233.326.312.638
1954년125437393631182667177603024526
9501.300.357.450.808
1955년1174584274112325241644321140020111485.288.336.384.720
1956년12650045458136331211226422514004066707.300.364.498.862
1957년110442390621202381219556375044068402.308.384.500.884
1958년1204593875712433911208621242460206286.320.419.537.957
1959년다이마이1245114547213032191915421714405124117.286.360.421.780
1960년13355847961152289122346213653599124113.317.405.489.894
1961년130560509831673511123771630439383211.328.385.466.851
1962년132520477581471721120149120134282920.308.364.421.786
1963년13240337035103153714539410223182310.278.334.392.726
통산 : 15년14885372480764214272845510621395971906118274165310446794.297.365.445.810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10. 연도별 투수 성적


도소

속등








4
구승

리패



















4














W
H
I
P
1949년오사카3420801117----.611702159.21691457--76112103814.561.421950년6511112----.3339623.02548--1130018166.261.431951년5100001----.0005410.12003--0001975.732.231952년5210002----.0006013.01616--1200874.851.69통산 : 4년502810121212----.500912206.02301974--976131381114.851.48



다미야 겐지로는 입단 초기에는 투수로서 활약했다. 1년째인 1949년부터 11승을 거두며 미래의 에이스로 기대를 받았다. 1950년 3월 16일 국철 스왈로스전에서는 9회 2아웃까지 주자를 한 명도 내보내지 않았지만, 27번째 타자인 나카무라 사카에의 타구가 후지무라 토미오의 판단 실수로 내야 안타가 되면서, 일본 최초의 퍼펙트 게임은 물론 노히트 노런도 놓치는 결과가 되었다. 투수로는 이 "퍼펙트 게임 미수"가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5]

참조

[1] 웹사이트 Kenjiro Tamiya https://www.baseball[...] 2019-04-27
[2] 웹사이트 TAMIYA, Kenjiro http://english.baseb[...] 2019-04-27
[3] 뉴스 Ex-batting star Tamiya dead at 82 https://www.japantim[...] Japan Times 2010-05-07
[4] 서적 プロ野球トラブルの歴史
[5] 뉴스 【3月16日】1950年(昭25) あと1人…田宮謙次郎 幻の完全試合第1号 http://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0-03-01
[6] 서적 プロ野球トラブルの歴史
[7] 문서
[8]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別冊夏祭号 1954-1972東映フライヤーズ暴れん坊伝説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0
[9] 서적 虹色球団 日拓ホームフライヤーズの10カ月 柏書房 2019-03-12
[10] 뉴스 暴れん坊たちが次々と 落日と移籍騒動 大杉の「次は兄貴の番」に「わかっとるわい」話の肖像画 元プロ野球選手・張本勲<17>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24-12-18
[11] 서적 二番打者物語 越智正典のネット裏45年Vol.2 勝機を呼んだつなぎ役列伝 ダイヤモンド社 1995-05-01
[12] 문서 虹色球団 日拓ホームフライヤーズの10カ月
[13] 웹사이트 野球の記録で話したい : 田宮謙次郎 二刀流の成績 http://baseballstats[...]
[14] 뉴스 内田雅也の猛虎監督列伝<番外>幻の阪神監督】阪神監督になれなかった―ならなかった―男たち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 2020-05-07
[15] 뉴스 朝日新聞縮刷版 朝日新聞 1983-03-15
[16] 웹사이트 【内田雅也の猛虎監督列伝(24)~第24代 村山実】激情家の「11」を襲った相次ぐ事件 https://www.sponichi[...]
[17] 뉴스 岡崎球団社長 辞任で田宮ヘッドフロントへ転出 https://web.archive.[...] 産経新聞 2013-11-30
[18] 서적 二番打者物語 越智正典のネット裏45年Vol.2 勝機を呼んだつなぎ役列伝
[19] 뉴스 田宮謙次郎氏が死去 プロ野球、阪神や大毎で活躍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0-05-05
[20] 간행물 ファン対談 監督俳優二人のTAMIYAのフィーリング 週刊ベースボール 1971-02-15
[21] 웹사이트 筑西市市民栄誉賞受賞者 http://www.city.chik[...] 筑西市 201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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